목차 1. 명성황후의 생애 2. 명성황후의 정책과 업적 3. 명성황후의 지위 4. 시대마다 다른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
본문 1. 명성황후의 생애
명성황후는 1851년 9월 25일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본래 1남 3녀의 형제가 있었으나 모두 죽고 황후만이 외동으로 남았다. 게다가 9세 때 아버지마저 타계(他界)하여 16세 때 왕비가 될 때까지 7년간 어머니와 더불어 고단하게 살았다. 황후의 집안은 6대조의 민유중(閔維重)과 5대조의 인현황후(仁顯王后)를 배출한 걸출한 집안 이었다. 그녀 역시도 인현황후에 대한 동경과 존경심을 갖고 유년기를 보냈다.당시 고단했던 황후의 과정과 명문의 후손이라는 점이 외척(外戚)의 세도를 싫어했던 대원군(大院君)으로 하여금 그녀를 황후로 간택(簡擇)하게한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학문을 배웠던 황후는 역사를 좋아하며 치란(治亂)과 국가의 전고(典故)에 밝았다고 한다. 이처럼 황후는 남자선비 못지않은 유교적 경륜(經綸)과 수양을 쌓았는데, 훗날 이것은 그녀가 고종보다 더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하며 조선의 지도자로써 행동하는 데에 밑거름이 되었다. 황후가 왕비로 책봉된 것은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기 약 5개월 전이었다. 이후 그녀는 고종의 조언자이며, 대원군과는 다른 정책노선을 펴게 된다. 고종과 황후는 1873년 11월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나면서부터 그들의 정책을 펴게 된다. 이 과정에서 황후는 강력한 근왕(勤王)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녀의 친인척들 중 개화사상에 눈뜬 자들을 중용하여 결국 자주적으로 문호를 개방하기에 까지 이른다. 이후에 급진적 개화와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이의 정치노선에서 조선사회를 이끌어가던 황후는 1895년 일본인 자객들에 의해 시해(弑害)된다. 우리는 이것을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 부르며 일본인들에게 국모를 잃은 치욕적인 날로 기억하고 있다.
본문내용 게다가 9세 때 아버지마저 타계(他界)하여 16세 때 왕비가 될 때까지 7년간 어머니와 더불어 고단하게 살았다. 황후의 집안은 6대조의 민유중(閔維重)과 5대조의 인현황후(仁顯王后)를 배출한 걸출한 집안 이었다. 한영우,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효형출판), 2001, 20p 그녀 역시도 인현황후에 대한 동경과 존경심을 갖고 유년기를 보냈다. 최은희, <씨 뿌리는 여인-차미리사의 생애>, (군화회), 1997, 133p 당시 고단했던 황후의 과정과 명문의 후손이라는 점이 외척(外戚)의 세도를 싫어했던 대원군(大院君)으로 하여금 그녀를 황후로 간택(簡擇)하게한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학문을 배웠던 황후는 역사를 좋아하며 치란(治亂)과 국가의 전고(典故)에 밝았다고 한다. 이처럼 황후는 남
참고문헌 최문형,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 (지식산업사), 2001 최은희, <씨 뿌리는 여인-차미리사의 생애>, (군화회), 1997 한영우,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효형출판), 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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